문화도시 13화. 기록으로 만나는 통영, 사라지지 않을 삶의 이야기

남쪽 끝 통영 땅을 밟은 것은 2010년 3월 10일, 벌써 15년 전이다. 그날의 기억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꾼 새로운 시작점이었다. 먼저 통영으로 내려와 집을 수리하던 남편, 두어 주 늦게 도착한 나. 우리가 맞은 통영의 첫날 밤은 쉽게 잠들 수 없는 날이었다. 덜컹덜컹, 쾅쾅. 오래된 아파트의 창문은 밤새 요란한 춤을 추었고, 도시 한복판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육중한 바람의 음성에 잔뜩 움츠렸던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마주한 찬란한 햇살 아래 눈부신 남해 바다의 윤슬에 압도되었고, 그때부터 우리의 서사도 시작되었다. 그 이야기는 셀 수 없이 많은 날들을 바라보고 거닐고 속삭이던 통영의 바다와 나무와 꽃들과 함께 내 가슴에, 그리고 내 책장 한편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기록’이라는 작업을 통해 책과 공간 등 다양한 미디어로 변주되어 공유되고 저장되어 왔다.
몸이 아파 안식년으로 통영에 내려왔다가 작은 삶에 반해 정착을 결심, 출판사를 시작하고 책방 문도 열었다. 어느덧 우리가 펴낸 책도 백 권을 바라보고 있다. 그 한 권 한 권에는 수많은 이들의 시간이 그물처럼 얽히고설켜 다양한 이야기로 응축되어 있다. 누군가 이 도시에서 삶을 살아내고, 그 삶이 이 땅의 공간과 시간을 수놓으며 역사를 만들고, 지금 우리는 그 시간들을 선물처럼 품고 살아간다. 우리가 통영에서 출판을 시작한 것은, 우리의 작고 반짝이는 삶이 휩쓸려 지나가는 파도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에서였다.
지역의 삶과 문화를 기록하는 것에 집중하게 된 까닭은 개인의 서사에서 출발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알려져야 할 수많은 이야기가 대한민국 곳곳에 풍성하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제대로 발굴하고, 기록하며 나누는 작업의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콘텐츠 기획자이자 스토리텔링을 업으로 삼았던 내게 통영은 다양한 문화예술 콘텐츠의 보고였다. 통영 12공방에서 비롯되는 장인의 DNA는 현대음악의 거장 윤이상과 문학의 어머니 박경리에게 이어졌고, 통영의 아름다운 바다는 수많은 문인과 화가들의 펜과 붓을 들게 했으며 춤과 노래, 연극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이 작은 도시 안에는 모든 예술의 향기가 집약되어 있었다.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하나둘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뛰었고, 이 근사한 이야기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나하나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통영의 공예를, 문학을, 음악을, 미술을, 음식을, 아름다운 섬과 바다를 책과 지도에 담았다. 그 과정에서 통영의 작가들을 발굴했고, 그들을 통해 더 깊은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통영만이 아니다. 대전, 부산, 거제, 순천, 제주, 함양 등 다른 도시로 외연을 넓혀 가치 있는 콘텐츠를 기록하고 널리 알리는 데 우리의 시간을 오롯이 집중했다.
도시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것은, 그 도시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모두가 서울만 바라보는 대한민국에서 조연처럼 여겨지는 작은 지역들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당당히 알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기록은 우리가 자칫 흘려보낼 시간, 유의미한 사건을 다시 살려내고, 기억하고, 지금의 삶과 연결하는 작업이다. 구전되는 이야기들이 아무리 빛나도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야기가 사라지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역사도, 사람들의 기억도, 그리고 결국 그 땅도 서서히 잊혀진다.
여전히 대한민국의 주요 언론과 뉴스는 서울발이다. 서울에서 시작해 서울에서 소비되는 뉴스 속에서 지역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은 신음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도 이 작은 마을의 서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기록되고 공유되는 순간, 그 이야기는 언제든지 다시 우리 삶으로 소환될 수 있다. 지역 소멸을 무한반복으로 외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의 기록은 작은 저항이기도 하다. 특히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기록하는 것은 통영에서의 우리 삶이 얼마나 충만하고 빛나는 시간이었는지를 되돌아보게 하고, 그 가치를 높이는 작업이기도 하다. 책이든 공간이든 혹은 영상이든, 이야기를 담는 그릇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각각의 이야기를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정성껏 빚고, 풍성한 이야기를 보기 좋게 담아 이웃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즐거이 나눌 수 있다면 그 이야기는 우리 삶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언젠가는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지역의 삶과 문화를 지키는 방법이다.
문화도시 통영의 기록, 아카이빙은 이제 시작되었다. 앞서 각 분야의 다양한 필진들과 함께 통영의 공예, 문학, 음악, 미술, 연극 그리고 다양한 문화행사와 공간을 개괄한 것은 더 깊이 있고 풍성한 이야기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 문을 열면 비로소 진짜 통영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지 않을 우리 삶의 터전, 이 아름다운 땅과 바다를 품은 작은 거인 통영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