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시 8화. 근대의 얽힘과 풀림, 통영의 미술

통영에선 무엇을 논하든 삼도수군통제영과 연결된다. 아무리 먼 곳으로 가서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쌓고 오더라도, 통영으로 들어서는 순간 조선 수군 총사령부의 위용에 압도당하기 마련이다. 근대 이후 미술과 화가들을 살필 때도, 12공방에서 비롯한 통영의 공예와 미술의 전통을 밑바탕에 두어야 한다. 전통과 맞서 대결하든, 받아들여 계승하든, 그들 앞엔 17세기부터 이어오며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실용성을 가미한 미술 작업이 있었다.

김용주는 통영 출신 최초의 서양화가로 손꼽힌다. 1910년 통영에서 출생한 그는 도쿄로 건너가 카와바타 미술학교 양화부를 졸업한 후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다. 귀국 후 활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중앙 화단으로 진출하지 않고 고향인 통영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는 사실이다. 통영문화협회 창립과 번창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애썼으며, 해방 후 통영중학교와 통영여자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59년 세상을 뜰 때까지 평생 300여 편의 작품을 그렸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방위(防圍)>, <아내의 초상화>, <소녀입상> 등이 대표작이다.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1940년대 이후 통영의 예술가들을 품고 이끌면서 미술과 음악과 문학이 어우러지는 판을 만들고 지속한 인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전혁림은 통영의 바다를 가장 완벽하게 화폭에 옮긴 화가다. 1915년 통영에서 출생한 그는 통영수산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줄곧 통영에서 부산까지 남해 바다를 오가며 창작에 몰두했다. 근대 미술과 문학과 음악을 배우려는 이들이 대부분 바다 건너 유학을 다녀온 데 반해, 작품으로 승부를 건 경우였다. 그림뿐만 아니라 도자기 채색화에도 특별한 관심을 가져 꾸준히 작업했다. 그가 거듭 열정적으로 그려낸 소재는 통영항과 통영 앞바다이다. 작품 제목은 제각각이지만, 나고 자라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늙어가며 거듭 바라본 그 바다를 압도적인 푸르름으로 표현한 것은 일관된다. 고향을 아끼는 깊고 큰 마음이겠다. 특히 <한려수도>는 통영과 그 주변 바다를 바탕으로 두되, 남해안에 두루 솟은 섬들을 아우르면서, 바닷길을 오가는 배들과 그 배들을 타고 오가며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희로애락까지 담아낸 수작이다.

김봉룡은 일제강점기부터 해외에서 활동한 나전칠기 장인이다. 1902년 통영에서 출생한 그는 박정수를 거쳐 전성규에게 나전칠기를 배웠다. 1924년 교토 세계박람회에 출품하였을 뿐만 아니라, 1925년 파리 세계장식공예품박람회에서 은상을 받았다. 1950년대에는 고향 통영에서 도립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 부소장으로 근무하며 후진 양성에 몰두하였다. 김봉룡은 양성소에서 전통과 근대를 잇는 가교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가 창안하여 연마한 나전칠기 줄음질 기법은 간결하면서도 대담하여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통영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뱃길을 이어주는 남해 바다의 대표적인 항구다.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국외와도 해로를 통해 수시로 무역과 교류를 이어나갔다. 이 푸른 길로 통해 많은 화가들이 통영을 오갔다. 몇몇 화가는 통영에 머무르며 뛰어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한국전쟁 기간에 통영에 머문 유강렬과 이중섭이 대표적인 경우다.

유강렬은 창작부터 교육까지 아우르면서 우리나라 근대 공예의 기반을 닦은 대표적인 공예가이다. 1920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미술학교 공예도안과를 졸업하였고, 제등공예연구소에 문하생으로 들어가 염색과 직조공예를 연구하고 창작하였다. 김봉룡과 함께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를 세우고, 주임 강사로 부임하였다. 조형 교육을 담당하면서도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가을>이 공예부 최고상인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 <가을>은 아플리케 기법을 활용한 작품으로, 통영의 언덕에서 풀을 뜯는 검은 염소들을 형상화하고 있다. 유강렬 스스로 이 작품이 다도해가 있는 남쪽 정서를 그려본 것이라고 밝혔다. 통영을 떠난 후 천착한 판화 작업에서도 남쪽 바다와 항구의 나날에 기댄 작품이 여럿이다.

이중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 중 한 사람이다.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난 그는 도쿄 문화학원을 졸업하였다. 1943년 제7회 미술창작가협회에 <망월>을 비롯한 9점을 출품하였고, 제4회 태양상을 수상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1953년 여름 밀항하여 도쿄의 가족을 만나고 온 후, 늦가을 부산에서 통영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강렬이 제안한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 데생 교사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때부터 이중섭은 본격적으로 자신을 대표하는 소를 그리기 시작하였고, 또한 통영을 담은 풍경화를 스무 점 가까이 남겼다.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이중섭 작품전>이 가능했던 것도, 이중섭이 통영에서 유강렬과 김용주를 비롯한 화가, 유치환과 김춘수를 비롯한 문인들의 도움과 배려 속에서 오직 창작에만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통영에서 대표작을 남긴 다섯 화가를 거칠게 살펴보았다. 통영이 고향인 화가도 있고 타향인 화가도 있으며, 통영의 전통과 거리를 둔 화가도 있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변용한 화가도 있다. 회화에서 염색과 판화에 이르기까지 표현방식도 다양하다. 그러나 아무리 다른 삶을 살고 다른 취향과 사상을 지녔다고 해도, 통영이 삼도수군통제영에서부터 비롯된 전통을 지닌 고을이라는 점, 바다를 통해 국내외 문화와 지식을 접하였기에 개방적이고 활기찬 항구라는 점은 공통된다. 앞으로도 이 틀 안에서 새로운 작품들이 양산되기를 기대한다.

사족으로 덧붙이자면,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 복원은 통영의 근대 미술을 재조명하는 데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다. 김봉룡, 유강렬, 이중섭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창작에 전념한 장소이기도 하고, 그들의 지도로 많은 제자들이 전통과 근대를 아우르는 화가나 공예가로 성장하였다. 김용주와 전혁림 또한 수시로 양성소를 드나들었다. 나전칠기의 맥을 새롭게 잇는 교육의 장이면서, 화가들이 통영에서 벌인 다양한 활동과 작품들을 감상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이 관점이 복원 과정에서 고려되어야, 두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는 갈매기처럼, 통영 화단의 참모습이 선명하면서도 풍부하게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