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시 5화. 건물에는 역사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일찍이 통영은 일본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으로 일본이 받아들인 서양의 근대문화가 빠르게 유입되었다. 항구로 수출과 무역도 활성화되고 어업으로 부유하기까지 했으니 교육 수준이 높은 지식인들도 많았다. 당시 지은 근대건축물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중에서 기억할 만한 역사와 의미를 지닌 건축물 네 곳을 소개한다.
‘조선 민중을 계몽하자’ 통영청년단회관
일제 강점기 만세 운동에 참여한 통영의 많은 청년들이 투옥되고 고초를 겪었다. 이에 뜻 있는 이들이 모여 민족의식을 높이고 사회 계몽을 하고자 ‘통영청년단회관’ 건립을 추진했다. 1923년 마침내 건립된 붉은 벽돌의 이 건물은 통영 사회계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특히 ‘통영청년단 활동사진대’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1921년 통영 봉래좌 영사회를 시작으로 평안도, 황해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순회했다. 활동사진(영화)은 여성 참정권을 다룬 <불란서 파리 여자 참정권 운동>이나 <가정의 주인>과 같이 조선인의 지위 향상에 대한 필요성과 일본 경찰의 폭력성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수익은 야학이나 수해 피해자에게 기부하였다. 이 건물은 이제 충무고등공민학교로 활용되고 있다.

‘조선 부녀자와 아이들을 위하여’ 호주 선교사의 집
통영을 대표하는 근현대 예술인들의 회고나 기록에서 자주 등장하는 곳이 있다. 바로 서문고개 위에 있던 ‘호주 선교사의 집’이다. 1894년 무어(Moore)를 비롯한 24명의 호주 선교사가 통영에서 활약했다. 당초 목적은 기독교 복음 전파였지만, 여성과 아이들의 교육, 욕지도, 사량도 섬마을의 의료 봉사도 활발하게 펼쳤다. 통영의 부녀자와 아이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호주 멜버른으로 보내고, 여선교연합회에서 바자회를 열어 판매한 수익을 통영으로 보내 주었다.
시인 김춘수는 “(호주 선교사의 집에서) ‘천사’를 처음으로 알았다”고 했고, 소설가 박경리는 <김약국의 딸들>에서 둘째 딸 용빈이 깊은 고민을 상담하러 가는 곳으로, 작곡가 윤이상에게는 ‘음악의 영감’을 준 곳이다. 현재는 건물이 사라졌지만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



통영 문화동 배수시설
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冬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 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백석 ‘통영2’
조선 사람들은 우물가에 모여 살았다. 통영성 안에는 아홉 개의 우물(九井)이 있었고, 명정골이라는 이름도 ‘명정(明井)샘’에서 따왔다. 우물을 떠서 밥을 하고, 세수를 하고, 우물가에서 빨래를 했다. 처녀며 새악시들이 매일 찾았기에, 수많은 사연을 담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달랐다. 1923년부터 미륵산의 풍부하고 깨끗한 계곡수를 끌어와 일본인들을 위주로 수돗물을 제공했다. 미륵산 저수지에서 공급받은 물을 저장했다가 다시 분할 공급하는 시설이 바로, 문화동 배수시설이었다. 상부에는 ‘천록영창天綠永昌(하늘이 내리는 복 다 받아 길이 번성하여라)’이라는 현판을 새겨 두었지만 수도료가 비싸 일본인 위주로 급수가 이루어졌다. 배수지는 지금도 서포루로 오르는 언덕길 옆에 남아 있다.

통영 해저터널을 왜 만들었을까?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과 1905년 러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군수 물자 가운데 하나로 생선의 공급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일본 어민들이 조선 바다에서 물고기를 어획해서 돌아갔으나, 이후 조선에 이주어촌을 조성해 정착했다.
통영의 경우 미륵도에 일본 오카야마(岡山) 어민들이 조성한 강산촌(岡山村), 히로시마(廣島) 어민들의 광도촌(廣島村), 도사(土佐) 어민들의 토좌촌(土佐村) 총 세 곳의 일본인 이주어촌이 생겼다.
이주어촌이 성장하자 섬인 미륵도와 통영 육지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만들고자 했다. 날로 대형화되는 여객선과 군함의 크기를 고려해 교량 대신 해저터널 건립으로 방향이 전환됐다. 1927년 착공한 통영 해저터널은 많은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1932년 완공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저터널이지만, 역사적 아픔도 지니고 있다.

전 영부인 공덕귀 생가, <김약국의 딸들> 박경리의 집
통영 충렬사 아래 명정동 골목 촘촘히 자리한 집들 사이에 작은 집 두 채가 있다. 그런데, 이 집에서 자란 두 명의 인물은 결코 작은 사람이 아니다. 통영시 명정동 380번지는 영부인 공덕귀 여사의 생가다. 그리고 바로 앞 명정동 382번지는 소설가 박경리의 거주지다.
공덕귀 여사는 결혼 뒤 윤보선 대통령 옆에서 영부인으로 살아갈 때보다 이후 생애가 더 알려져 있다.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 피의자 옹호, 구속자 가족협의회 구성, 양심수 어머니 돕기, 방림방적 체불임금 대책위원회, 동일방직 똥물 사건, 한국원폭피해자 문제 등 1970-1990년대 민주화 사건과 운동에 늘 함께했다.
공덕귀 여사의 삶은 바로 앞집에 살던 15살 소녀 박경리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공덕귀 여사의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가족을 건사했듯, 박경리의 어머니도 삯바느질로 딸을 돌봤다. 공덕귀 여사는 호주 선교사의 도움으로 학교에 진학했고 선교사를 꿈꾸었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에도 호주 선교사가 등장한다. 공덕귀와 박경리의 집 조금 아래에 시인 백석이 애타게 만나고 싶어했던 ‘난(蘭)’의 집도 있다. 이 여성들이 모두 이 부근에서 나고 자란 것이 과연 우연일까?

